세계로 가는 K-Beauty, 얼굴에 칠한 색의 역사

신화남 뷰티 갤러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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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화 남
신화남뷰티 갤러리 대표
/대한민국산업현장 교수

세계로 가는 K-Beauty, 얼굴에 칠한 색의 역사

화장(化粧)은 얼굴을 곱게 꾸미는 치장 행위로 정의되지만 이 외에도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얼굴을 가꾸는 행위를 가리키는 미용(美容)의 의미, 인체를 청결하게 하거나 미화하는 행위, 아름다운 부분을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 또는 위장하는 수단 등 여러 의미로 확대해 볼 수 있다. 더 넓게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 억지로 아름답게 꾸민다는 분장(扮裝)의 의미까지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본디 화장(化粧)이라는 낱말은 우리나라의 고유어가 아니라 개화기 이후에 도입된 말이다. 화장이라는 낱말은 대상이나 행위에 따라서 또는 기초화장인가 색채화장인가, 화려한가 수수한가, 담백한가 요염한가, 옷치장이나 몸치장까지 곁들였는가에 따라 여러 비슷한 말로 세분화 되어 있다. 가화(假化), 가식(假飾), 화장(化粧), 화장(化裝), 야용(冶容), 장식(粧飾), 단장(端粧), 담장(淡粧), 농장(濃粧), 염장(艶粧), 응장(凝粧, 미용(美容)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화장이라는 의미의 낱말이 세분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의식 발달과 화장기술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의 화장은 어떻게 발전하여 왔을까?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흰색을 귀하게 여겼다. 희고 윤택한 피부는 고귀한 신분을 상징했기 때문에 여성은 물론 남성들도 백옥 같은 피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화장은 미인이 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술적 의미, 신과의 교신, 상대방을 위협하고자 하는 화장 등도 같이 발달해 왔다. 이것은 삼국시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에서는 고분벽화 쌍영총에 남겨진 남녀의 입술과 볼이 붉게 화장된 것으로 보아 5~6세기경에 이미 연지 화장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백제에서는 피부 표현을 하얗고 연하게 하는 화장 기술이 발달했으며, 일본인들이 백제의 이러한 화장법을 배워갔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화장을 늦게 시작했으나 기술은 더 뛰어났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색깔 있는 화려한 화장이 인기였다. 특히 여기에서는 남성들도 화장을 했는데, 화랑(花郞)의 화장이 대표적이다. 화랑들은 지식과 무예를 두루 갖춘 미소년들을 위주로 선발했는데 얼굴에 분을 바르고 구슬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한다. 화랑들은 여성들 못지않은 화장을 하고 치장을 했으며, 홍화(紅花)로 연지를 만들어 이마와 뺨 입술에 바르고 백분으로 색을 만들어 사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화랑은 어릴 때부터 적에게 어려보이지 않고 강하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화려한 문화예술이 만개했던 고려시대에는 화장뿐 아니라 모든 생활이 사치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신분에 따라 화장법이 나뉘기도 했다. 짙은 화장은 기생이 즐겨 했고, 신분이 높은 부인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고 연한 화장을 즐겨 했다. 고려시대는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여성의 인권도 존중이 되었는데 사회적, 신체적 능력에 따른 신분이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차별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기에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고 한다. 이 시대에 화장품 만드는 기술은 일본과 중국에 전할 정도로 발달했고 화장술 또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화장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화장이 부덕한 행위로 간주되기 조차 했으나 위축되거나 소홀하지 않고 오히려 신분에 따른 화장법이 두드러지게 세분화되고 고급스럽게 변모했다. 조선의 기생들은 화려한 색조화장을 즐겼지만 사대부 여인들은 최대한 본인의 얼굴 생김새를 바꾸지 않는 화장을 했다고 한다. 사대부 여인들의 일상화장과 기생, 궁녀 등 특수층 여성의 의식화장이 구분이 되고, 특별한 날의 화장법도 차별화가 되어 세분화 됐다. 18세기 조선의 대표 미인상을 알 수 있는 단원 신윤복의 ‘미인도’ 는 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정갈하게 땋아 올린 머리에 작고 갸름한 얼굴, 희고 고운 피부에 꽃잎을 머금은 듯 살짝 붉은 입술, 귀밑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잔머리가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 미인의 기준은 옥같이 흰 살결, 가늘고 수나비가 앉은 듯한 눈썹. 복숭앗빛 뺨. 앵두같이 붉은 입술. 구름을 연상케 하는 머리. 가는허리를 소유한 팔등신 미인을 으뜸으로 여기어 이에 준하는 화장법이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으로 인해 산업화가 늦어지면서 외국의 화장품 기술발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게 된다.
화장 문화의 발전은 화장품의 발전과 맞닿아 있다. 조선 말기 명성황후는 러시아제 화장품을 즐겨 썼다고 하는데 1918년 8월, ‘박가분(朴家粉)’이라는 화장품이 처음으로 만들어져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으로 등록이 된다. 박가분을 처음 만든 사람은 두산그룹 창업자인 박승직 회장의 부인 정정숙 여사로 알려져 있다. 부업으로 했던 것이 대중화가 되어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은 제품이 됐다. 그 당시 박가분은 모방상품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가격도 저렴해서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판매방식은 박물장수가 짊어지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아다니면서 파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 하루에 5만 갑이나 팔렸다고 한다. 그런데 생산방식이 재래식에 머물었고, 납 성분의 부작용으로 물의를 빚어 소문이 돌면서 1937년 결국 폐업을 하게 된다. 이 무렵 비공식 경로를 통해 수입되었던 백분은 납 부작용이 적어 국산품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고, 그 결과 국산화장품에 대한 불신감을 낳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들의 화장은 서양 미인들을 기준으로 하여 서구적인 얼굴로 보이기 위해 입체적인 화장을 선호했다. 평평한 얼굴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홑꺼풀의 눈은 쌍꺼풀이 있는 것처럼 크게, 콧날도 더욱 오뚝하고 입술은 도톰하게 보이는 화장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얼굴을 입체감 있게 변화를 주기 위해선 화장품의 도움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1960년대 말부터는 북을 치고 돌아다니며 크림을 파는 ‘동동구리무’ 장수들이 등장했다. 1970년대에는 좀 더 발전한 방문화장품 판매가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또한 의상의 유행이 화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반영되기 시작한다. 화장품 회사의 주도하에 색채화장이 활성화 되고 입체 화장이 생활화되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는 컬러TV의 방영으로 색채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폭발적이었는데 이 진한 색조화장 열풍은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특히 배우와 가수 등 여성 연예인들이 최신 화장 문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청순미를 강조하는 자연스러운 화장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2000년대부터는 ‘민낯’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화장을 하지 않은 것처럼 티 안 나는 화장이 최근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화장품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들 화장품 화보를 보면 자연스러운 화장이 대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K-Beauty’라 불리는 한국 여성들의 화장법과 화장품은 새로운 한류상품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오늘날에는 화장기술과 화장품의 발달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매일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소녀 같은 분위기, 깨끗한 피부 강조, 강렬한 분위기 표현 등 그 어떤 화장도 스마트폰만 열면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전 세계의 많은 뷰티 블로거들로 부터 차근차근 화장법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는 여성들이나 예술인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던 화장이 요즘에는 젊은 남성들까지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화장품 회사에서도 남성 뷰티블로거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한다.
꾸미고 가리는 화장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찾아주는 똑똑한 화장으로, 화장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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